問題一覧
1
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고 불만이 많은 지방 영주들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( )을 일으켰다.
임진왜란
2
처음 왜군을 맞은 부산성과 동래성이 함락되었고 ( )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항전하였지만 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.
신립
3
선조는 ( )로 피난을 떠났고, 명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.
의주
4
( )이 이끈 조선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당포, 한산도 등지에서도 승리를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고, ( )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.
이순신, 전라도
5
전직관리, 사림, 승려 등이 조직하고 농민이 주축을 이룬 ( )은 향토지리에 맞는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.
의병
6
조ㆍ명 연합군은 ( )을 탈환하였고, 권율이 ( )에서 승리하였다.
평양성, 행주대첩
7
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 조선은 ( )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, ( )을 시행하여 지방군 편제를 개편하였다.
훈련도감, 속오법
8
명과 일본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어 왜군이 ( )을 일으켰고, 이순신이 ( )에서 적의 함선을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후퇴하였다.
정유재란, 명량
9
에도 막부는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하자 조선은 ( )를 일본에 파견하여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왔다.
사명대사(유정)
10
광해군은 일본과 ( )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.
기유약조
11
일본은 쇼군의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사절단을 요청하였고, 이에 조선은 ( )를 파견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전해주었다.
통신사
12
왜란이 끝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( ) 세력을 지지기반으로 전쟁을 뒷수습하고,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.
북인
13
광해군은 농지 개간을 장려하고 토지와 호적 조사를 시행하였다. 또 현물로 내던 공납을 쌀로 내게 하는 ( )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.
대동법
14
광해군은 허준에게 ( )을 편찬하도록 하였으며, 불타버린 ( )를 다시 건립하였다.
동의보감, 사고
15
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명의 국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( )을 세운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명을 공격하였다.
후금
16
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는 ( ) 정책을 펼쳤다.
중립 외교
17
광해군의 외교 정책과 인목 대비를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을 비판하며 서인은 ( )을 일으켜서 광해군과 북인 세력을 몰아냈다.
인조반정
18
인조와 서인 세력은 ( ) 정책을 추진하였고,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( )을 일으켰다.
친명배금, 정묘호란
19
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,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왔다. 이에 조선에서는 외교적 교섭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( )과 대의 명분에 따라 끝까지 싸우자는 ( )이 대립하였다.
주화론, 주전론(척화론)
20
청 태종이 군대를 이끌고 다시 쳐들어오자(병자호란) 왕과 대신들은 ( )으로 피란하여 45일 동안 항전하였으나, 결국 청에 굴복하고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(삼전도의 굴욕).
남한산성
21
효종, 송시역, 송준길, 이완 등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( )을 전개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.
북벌 운동
22
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( )이 제기되기도 하였다.
북학론
23
( ) 때 청의 요청으로 2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파견하여 러시아를 정벌한 ( ) 사건이 있었다.
효종, 나선정벌
24
선조 때 ( )의 관직을 두고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졌다.
이조전랑
25
선조 때 ( )과 정철의 ( ) 사건으로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졌다.
정여립 모반 사건, 건저의
26
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였으나, 효종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( )이 일어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극심해졌다.
예송
27
1차 기해예송은 ( )의 1년 설이 채택되었고, 2차 갑인예송은 ( )의 1년 설이 채택되었다.
서인, 남인
28
허적의 유악 남용 사건과 삼복의 변이 계기가 되어 숙종 때 ( )이 일어났다.
경신환국
29
남인계 장씨의 소생(후에 경종)을 원자로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( )이 일어났다.
기사환국
30
( )은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여 다시 서인이 집권하였다.
갑술환국
31
( ) 때 남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서인은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어졌다.
경신환국
32
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( )의 추세가 나타났다.
일당 전제화
33
영조는 ( )을 실시하여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정국을 운영하였다.
탕평책
34
영조는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( )의 존재를 부정하였고, 붕당의 기반인 ( )도 대폭 정리하였다.
산림, 서원
35
( )는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과 3사 관리 선발 관행을 혁파하였고, 탕평 의지를 내세우기 위해 성균관 앞에 ( )를 세웠다.
영조, 탕평비
36
영조는 ( )를 부활하고 상언, 격쟁을 통해 왕이 직접 백성의 의견을 들어 정책에 반영하였다.
신문고
37
영조는 ( )을 시행하여 군포를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여주었다.
균역법
38
영조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으며, ( , , )를 편찬하여 시대 변화에 맞게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.
속대전, 속오례의, 동국문헌비고
39
정조는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인물이나 중ㆍ하급관리 가운데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( )를 시행하였다.
초계문신제
40
( )은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하였으나,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을 부여하고 과거 시험을 주관하고 문신을 교육하는 임무까지 부여하였다.
규장각
41
정조는 친위 부대인 ( )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 기반으로 삼았고, 지방사림이 주관하던 군현 단위의 향약을 ( )이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였다.
장용영, 수령
42
정조는 양주에 있던 아버지 묘소를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 북쪽에 새로운 성곽 도시인 ( )을 건설하였다.
화성
43
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고, ( )으로 자유로운 상공업 활동을 보장하였다.
신해통공(금난전권 폐지)
44
왕의 외척인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이 순조, 헌종, 철동의 3대 60여 년간 정권을 잡은 ( )가 전개되었다.
세도 정치
45
순조 때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남인 등의 시파를 몰아내기 위해 1801년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( )를 일으켰다.
신유박해
46
세도 정치 시기에 의정부와 6조가 유명무실해지고, ( )에 권한이 집중되었다.
비변사
47
세도 정치 시기에 농민에 대한 수탈이 더욱 심해져 전세 수취 제도인 전정, 군포 징수제도인 군정, 구휼 제도인 환공 등 ( )이 극에 달하였다.
삼정의 문란
48
삼정 가운데 농민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( )이었다.
환곡
49
삼정의 문란은 1811년 ( )이나 1862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( ) 등 농민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.
홍경래의 난, 임술 농민 봉기