問題一覧
1
1883년 ( )의 체결로 일본에 대한 최혜국 대우가 규정되었다.
조일 통상 장정
2
조선이 1876년에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에 따라 ( ), 원산,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다.
부산
3
민종식과 최익현 등은 ( )이 체결되자 이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다.
을사늑약
4
( )의 난은 1811년 평안도 지역민에 대한 차별과 지배층의 수탈에 항거하여 일어났다.
홍경래
5
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고종은 연호를 ( )로 정하였으며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.
광무
6
최익현 등은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( )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였다.
일본
7
( )의 결과 일본 정부가 추천한 스티븐스와 메가타가 각각 대한 제국의 외교 고문과 재정 고문에 임명되었다.
제1차 한일 협약
8
흥선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기부금인 ( )을 강제 징수하였다.
원납전
9
독립 협회는 ( ) 공사 관에 머물고 있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였다.
러시아
10
흥선 대원군은 지방 사족의 근거지로서 농민을 수탈하던 ( )을 전국에 서 47개소만 남기고 나머지는 철폐하였다.
서원
11
( )의 체결로 허가를 받은 청 상인에게 양화진과 한성에 상점을 개설할 수 있는 특권이 보장되었다.
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
12
동학 농민군은 일본군에 맞서 제2차 봉기를 일으켰으나 공주 ( ) 전투에서 패하였다.
우금치
13
일본인 재정 고문인 메가타는 ( )을 주도하여 백동화 등을 일본 제일 은행권으로 교환하게 하였다.
화폐 정리 사업
14
대한 제국은 1900년에 칙령 제41호를 통해 ( )가 우리 영토임을 밝혔다.
독도
15
흥선 대원군은 군정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( )를 실시하였다.
호포제
16
상업이 발달하면서 일부 사상은 독점적 도매상인인 ( )로 성장하였다.
도고
17
정부는 임술 농민 봉기 당시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( )을 설치하였으나 미봉책에 불과하였다.
삼정이정청
18
조선 후기에 ( )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납속, 도망 등의 방법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다.
천민
19
러일 전쟁의 종결을 위해 일본과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( ) 조약을 체결하였다.
포츠머스
20
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( )이 직접 정치를 하면서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완화되었다.
고종
21
을미개혁으로 태양력이 채택되었고 ( )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.
건양
22
조선 후기에 ( )법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고 1인당 경작 면적이 확대되었다.
모내기
23
독립 협회는 의회 설립 운동을 전개하여 ( ) 관제가 반포되는 데 기여하 였다.
중추원
24
( )은 「유교 구신론」을 발표하여 유교를 개혁,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.
박은식
25
1882년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( )이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청에 납치되었다.
흥선대원군
26
조선은 개항 후 1880년에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기구인 ( )을 설치하였다.
통리기무아문
27
사림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성리학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기관으로 ( )을 설립하였다.
서원
28
( ) 사건을 구실로 1871년에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.
제너럴 셔먼호
29
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맞서 문수산성에서 한성근 부대, ( )에서 양헌수 부대가 항전하였다.
정족산성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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함경도 덕원에 설립된 ( )는 근대 학문과 외국어를 교육한 학교이다.
원산 학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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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 )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.
시전 상인
32
서재필과 개혁적인 관료들 및 지식인들은 독립문 건설을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( )를 창립하였다.
독립 협회
33
( )을 중심으로 수립 된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제1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.
김홍집
34
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맞서 전봉준 등이 이끄는 농민들이 ( )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파괴하였다.
고부
35
위기의식을 느낀 보수 세력은 독립 협회가 정치 체제로 ( ) 수립을 추진한다고 모함하였다.
공화정
36
1907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의병 연합 부대인 ( )이 결성되었다.
13도 창의군
37
무장에서 봉기한 동학 농민군은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( ),폭정을 제거하여 백성을 구한다는 제폭구민의 구호를 내세웠다.
보국안민
38
제2차 갑오개혁 당시 고종은 부국강병을 위해 교육을 강조한 ( )를 반포하였다.
교육 입국 조서
39
( )은 토산물로 내던 공물을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, 무명, 베, 동전 등 으로 징수한 제도이다.
대동법
40
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( )을 참고하여 서양의 사상과 제도까지 받아들이는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다.
메이지 유신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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제2차 수신사인 김홍집이 가져온「조선책략」은 조선이 ( )과 수교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 하였다.
미국
42
천민의 대다수를 차지한 ( )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 · 상속 · 증여가 가능하였다.
노비
43
박문국에서 발행한 ( )는 정부가 발행한 최초의 근대적 신문이다.
한성순보
44
대한 제국이 진 빚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서상돈 등은 대구에서 ( )을 제창하였다.
국채 보상 운동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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갑신정변 이후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대립이 심화되자 조선에 주재하던 독일의 외교관 ( )는 조선 중립화 방안을 제안하였다.
부들러
46
독립 협회는 ( )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는 등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.
러시아
47
임오군란 결과 조선과 청 사이에 체결된 ( )은 조선 내에서 청 상인이 특권을 보장받으며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.
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
48
1909년 만주 하얼빈역에서 ( )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.
안중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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실력 양성 운동을 추진하면서 공화 정체의 근대 국가 건설을 지향한 단체인 ( )는 오산 학교와 대성 학교를 설립하였다.
신민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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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 )와 여각은 상품의 위탁 판매와 매매를 중개 하거나 숙박, 금융업에 종사하였다.
객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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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는 ( )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였다.
우정총국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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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( )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.
헤이그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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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 )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 운동을 벌여 이를 철회시켰다.
보안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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고종은 대한 제국이 자주 독립국이며 황제가 전제 정치를 실시한다는 내용의 ( )를 반포하였다.
대한국 국제